|
웃음 그리고 웃음 태양을 보고 쐐기풀에서 돌에서 오리에서 숫양에서 교황의 오줌에서 미라에서 똥으로 가득 찬 관에서
[ 조르주 바타유, 웃음 연작 中, Georges Bataille, Le Rire 中 ]
웃음은 숭고와 저속을 뒤섞는 매개다. 시체는 인간 존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지점이면서 동시에 가장 근원적인 실존의 흔적이다. 죽음 이후 사체는 단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배설물과 유사한 형태로 부패되거나 뜯어 먹혀 배설물로 다시 배출된다. 바타유에게 웃음은 결코 고상한 정서가 아니다. 숭고함과 저속함이 한꺼번에 충돌하며 터져 나오는 반응이며, 죽음과 배설, 욕망이 한순간에 뒤엉킬 때 발생하는 가장 육체적인 발성이다.
박유선의 [우리 꼭 다시 만나] 역시 이와 닮았다. 시작부터 발성되는 음란한 키스음과 욕망의 메아리는 ‘우아한 사랑 이야기’의 포장지를 순식간에 찢어버리며, 사랑과 윤회라는 숭고한 테마를 저속한 욕망과 죽음의 감각으로 뒤섞는다. 작품은 필연과 재회의 서사를 품고 있지만, 절대로 감미롭지 않다. 오히려 웃음과 욕설, 폭력과 죽음이 한꺼번에 소용돌이치는 광기의 카니발이다. 이 구조는 바타유가 강조한 ‘저속을 통한 초월’의 미학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이 구조에서 보면 이 애니메이션은 사랑이 가진 숭고성 아래에 숨겨진 욕망과 폭력의 계단을 폭로하는 거대한 웃음의 서사다.
![01[16].png](/kyh0924_admin/WebEditor/SmartEditor/photo_uploader/upload/01[16].png) [우리 꼭 다시 만나]가 흥미로운 지점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고귀한 감정으로 추앙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다 좆까라!’며 허무주의로 도망치지도 않는다는 데에 있다. 오히려 감독은 그 중간 지점에서 불쾌함과 연민, 폭력과 유머가 동시에 작동하는 감정의 진자운동을 보여준다. 박유선은 사랑의 카타르시스를 끝없이 반복되는 오해와 착각, 그리고 타이밍의 오류로 보며 철저히 ‘충돌’의 영역으로 끌어내린다. 돌고래와 꽃, 남녀와 원숭이로 전생을 거듭하며 이어지는 다섯 원자의 서사는 전통적인 윤회 로맨스의 구조를 따라갈 듯한 기대를 관객들에게 줄 듯 말 듯하다가도, 그 끝은 늘 배설물처럼 찌그러진 형태로 왜곡된다. 가장 극적인 재회의 순간조차, 돌고래는 쇼에 묶여 있고, 원숭이는 파리 날리는 우리에 방치되어 있으며, 인간 남녀의 프로포즈는 교제살인으로 끝나고, 꽃은 그저 꽃이다. 특히 연출 면에서 리듬감 있는 편집과 키치한 화풍, 그리고 그 사이에 돌연 끼어드는 고어(gore)한 폭력을 결합해 ‘정서적 파국의 타이밍’을 정교하게 조율한다. 맥락상 웃어야 하는 장면에선 뒷맛이 씁쓸한 비소(誹笑)가 지어지게 하면서도, 가장 잔혹한 장면에서 돌연 유치한 유머가 터진다. 장면 간 감정 전환속도도 굉장히 빨라 14분간 ‘관객을 갖고 놀겠다’는 감독의 강렬한 의지가 느껴진다. 결국 관객은 이 모순을 이해하려 애쓰다가, 그저 웃음으로 응답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놓인다. 그렇다. 모르겠으면, 웃는 수밖에.
![01-1[9].png](/kyh0924_admin/WebEditor/SmartEditor/photo_uploader/upload/01-1[9].png) [우리 꼭 다시 만나]는 ‘시공 초월 윤회 로맨스’의 포장을 쓴 코미디도 아니고, 그로테스크 애니메이션도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신실히 믿는 자만이 만들 수 있는, ‘잔혹한 진실의 우화’다. 그래서 이 애니메이션의 마지막 대사 ― “찾았다, 내 사랑들” ― 이라고 말하는 빨간 원자에게, 나머지 네 피해자(?) 원자들이 말하는 ― “야이 개샊갸.” ― “꺼져, 이 씹샊갸.” ―는 욕설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정직한 고백처럼 들린다.
사랑은 숭고하다. 동시에 사랑은 추잡하고, 더럽다. 그 모순을 정면으로 응시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랑이라는 감정의 실체를 이해하게 된다. 구질구질해도 멈출 수 없고, 지리멸렬할 정도로 저속하기에 사랑은 웃기다.
글 관객심사단 김담
|
|